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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全斗煥, 1931년 1월 18일 ~ )은 군인 출신의 정치인으로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전주. 아호는 일해(日海)이다. 12·12 군사 반란으로 집권하고 군사 독재 뒤 민주화 이후 내란 및 군사 반란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1심에서 사형,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사면되었다.
생애유년기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 가야면에서 전상환과 광산 김씨 김점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이 독립운동가라는 견해가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위로 세 명의 형이 있었으나, 두 형 중 전열환은 고향 친구들과의 놀이 도중 사고로 사망하였고 둘째 형 전규곤은 사고로 사망하였고, 셋째형 전기환과 그, 동생 전경환과 누이들만 살아남았다. 그가 5세 되던 해에 그의 가정은 경상남도 합천에서 대구로 이사하였다. 그 곳에서 소학교와 대구북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우수한 성적이었다 하며 6.25전쟁 중 1951년 2월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군인 생활대구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 사관학교에서 동기인 노태우·정호용 등과 만나 친분을 쌓고 인맥관계를 형성하였으며 1955년 2월 육군사관학교을 졸업하고 육사11기로 육군소위에 임관하였다. 1961년 5월 16일에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육사에서 대위로 있던 그는 육사 내에서 지지 시위를 주도하여 박정희 前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의 비서관에 임명됨으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하였다. 소령 계급이었던 1962년에 하나회를 조직하여 군부내에 인맥을 형성하는 한편,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을 거쳐, 1969년 육군본부 수석부관을 지냈다. 1970년에는 육군 대령으로 연대장이 되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고, 1971년 귀국후, 장군으로 진급, 그뒤 제1공수특전단 단장,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8년 제1사단장을 지냈다. 장군 진급 후 육사 11기 출신과 그 후배기수가 가입된 군장성 모임인 하나회를 결성하였는데 그의 동기 기수가 주축이 되었다. 하나회에서 윤필용 등과 함께 하나회를 이끌어갔으며 윤필용과 하나회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기도 하였다. 1978년 윤필용 필화 사건으로 박정희에 의해 하나회가 군부내 사조직으로 적발되어 위기에 몰렸으나, 1979년 3월 기적적으로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윤필용은 수감 중 강제퇴역당하였고 전두환은 하나회의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군사반란과 집권 과정
1979년 10월 26일에 대통령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시해되는 10·26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혼란과 함께 권력공백으로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직으로 일시 권력을 승계하였다. 11월 권력공백에 의한 혼란 중에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범으로 체포되었고, 같은 달 최규하는 제10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허삼수 등 육사 11기출신의 모임인 하나회 멤버를 주축으로 하여 신군부를 형성하였고, 신군부가 12·12군사정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같은 해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계엄사령관 육군 대장 정승화 등을 김재규 등과 공모한 공범으로 체포하고, 이 과정에서 김오랑 소령 사망사건 등 물리적 교전이 발생하였다. 1980년 육군중장으로 진급하고, 이어 중앙정보부 부장 서리가 되었다. 1980년 5월 북한군 침투설이 돌자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발표하였고, 5월 18일 시민군과 군병력간에 발생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계엄군을 투입, 5월 20일 무력로 진압하였다. 그 뒤 국무회의와 정권을 장악한 뒤, 그해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이어 8월 5일 육군대장으로 진급하고, 8월 22일 예비역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제5공화국
11대 대통령8월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여 그해 8월 27일 그는 대통령 후보자에 출마, 경쟁자 없이 단독 출마로 장충동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간접선거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80년 9월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그 해 9월 법률의 연좌제를 공식 폐지하였고, 10월 17일 정당해산령을 내려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의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과 민주당계 야당인 신민당을 강제해산시켰다.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에 입당, 민주정의당의 초대 총재가 되어 2월 개정된 새헌법에 따라 장충동체육관에서 치러진 선거로 90.6%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제12대 대통령(7년 임기에 단임)에 당선되었다. 일반적으로 그는 노태우 등과 함께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진압 지휘체계의 실질적인 주요 핵심 책임자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정확한 명령계통[출처 필요]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2대 대통령12대 대통령 취임 후에 그는 박정희 정권을 전면 부정하였다. 박정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는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하였다. 또한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로 엮어서 제거하고,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하였다.[1] 또한 대통령 연임제를 철폐하고 대통령 단임제를 실시하였다. 집권 후 정책의 주요 강령으로 정의사회구현, 복지사회건설을 구호로 내걸었으며, 재임기간 중 물가안정, 범죄 소탕, 경제 성장, 88 서울 올림픽 개최 준비 성공, 무역흑자 달성 등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일부 국민들과 민주화 운동가들에 의해 군부독재자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집권 과정에서 행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으로 후에 제6공화국때의 5공청문회와 1993년 김영삼 집권 후 문민정권에서 사법심판을 받게 된다. 5.18 이후 야당 지도자인 김영삼·김대중 등을 가택연금하였는데 1983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이하여 전두환 정권의 야당인사 탄압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23일간 단식투쟁을 시도하기도 하였다.[2] 1981년 민족문화를 소재로 국풍(國風)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축제를 벌였으나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당해 성공하지 못하였다.[3] 1983년 10월 9일, 동남아시아 국가 순방 기간 동안 순방국 하나인 버마(미얀마)에서 아웅산묘소 참배 도중 북한에서 보낸 공작원들에 의한 폭탄테러사건이 발생하였다. 1진으로 도착하여 예행연습 중이던 이범석, 심상우, 함병춘 등 80명의 외교관과 취재진 및 현지안내인이 피폭으로 즉사하였다. 현지 한국인들을 방문하고 뒤늦게 2진으로 방문한 그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국민들의 개헌과 민주화요구를 묵살하고 당시 현행 헌법에 따라 13대 대선 때도 12대 대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1988년 2월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특별담화인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에 호헌철폐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그 해 경찰의 피고인 성추문 사건인 문귀동 성추문 사건과 그해 10월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등과 맞물려서 6월 10일에는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을 시발점으로 반정부적 성격의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시국 수습을 위해 1987년 6.29 선언이 발표되었고,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단안을 발표하였고, 7월 9일 그는 이를 수용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7월 10일에는 민주정의당 총재직을 사퇴하였다. 퇴임 후1988년 2월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그는 국가원로자문회의등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들었으나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어 제 5공화국의 청문회가 진행이 되었다. 여기서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하다가 1988년 11월 23일, 대국민 사과와 함께 재산헌납을 발표하고, 강원도에 있는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1990년 12월 30일 하산하였다. 김영삼의 문민정부 출범 후 서석재와 박계동 등이 대통령 4천억 비자금 수뢰설을 주장하였으나 무대응으로 대응하다가 김영삼 정권의 내사로 비자금 수수가 밝혀지면서 1995년에는 12.12 사태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및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노태우와 함께 구속수감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97년 12월 22일 대통령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다. 또한 그는 1995년에 제정된 5.18 특별법으로 법에 따라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한 공로로 받은 훈장 등을 박탈당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훈장 9개를 반납하지 않은 상태이다. 12·12 사태 및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재판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이순자 여사
1995년 11월 16일 후임 대통령인 노태우의 수감을 계기로 12·12 군사 반란 및 5.18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국민적인 요구가 거세어졌으며, 당시 대통령 김영삼도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운동을 선언하였다.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이 내려지자 검찰은 재수사에 착수, 12월 3일 전두환과 관련자 16명을 내란 및 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하였다. 동시에 제5공화국의 비리에 대한 수사도 진행되었다. 공판은 1996년 3월부터 진행이 되었는데,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사형을, 1996. 12. 16. 서울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을(96노1892) 각 선고받았으며, 1997년 4월 17일에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4] 수감 생활을 하다가 같은 해 12월 22일에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한 특별사면에 의해 풀려났다. 그러나 추징금은 사면대상이 아니며 재산은닉의 혐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통장에 29만 1,000원밖에 없다며 추징금을 내지 않고 있어 약 1,673억원이 환수되지 못하고 있다. 외교 관계대미 관계미국의 압력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개발한 핵을 폐기하였다는 견해가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친미적 성향의 외교관계를 형성하였다. 대일 관계그는 대통령 재임중,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에도 국권피탈의 책임이 일부 있었다고 인정해 당시 일본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되었다. 1981년 8월 15일에 있었던 광복절 기념식의 연설에서 그는 「우리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치욕을 둘러싸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꾸짖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의 정세, 국내적인 단결, 국력의 약함 등 자책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하였다. 또 이듬해의 광복절 기념식전에서도, 일본 정부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에 의해 일본인에 대한 택시 승차거부가 일어나는 등 반일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던 때, 강경적인 자세를 보이면서도 「이민족 지배의 고통과 모욕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한 확실한 보장은, 우리를 지배한 나라보다 살기 좋은 나라, 보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내는 길 밖에 없다」라고 말해 맹목적 「반일」보다는 실력을 형성한 「극일」주의를 강조했다. 평가전두환에 대한 평가는 현재 극과 극이며 대부분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룬다. 그의 평가는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를 가르는 척도들 중의 하나로 통용되기도 하지만, 시각이 전혀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보수주의의 일각에서도 전두환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으로 평가하는 세력이 존재한다. 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이해당사자들의 사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타고난 유들유들함과 비위로 위관급 장교시절부터 철저한 '정치군인'의 면모를 드러냈다. 이후 청와대 경호실 근무 경험으로 '정치군인'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자질을 다 갖추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5] 정승화도 전두환이 정치적 야망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하였고, [6] 전두환은 이후 대통령 박정희와의 잦은 교제를 통해 권모술수의 능력을 길러온 것으로 알려졌다. [7] 그의 붙임성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으며, [8] "전두환 전 대통령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팬클럽도(http://cafe.daum.net/leejongpirl/) 있다. 또한 범죄소탕과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는 성과를 이룩했다는 일부의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의 평가경제안정과 성장을 시켰다는 견해가 있으며 2000년대 이전에 전사모(전두환 전 대통령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단체가 출범하였으며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북한군 개입설이 주장되면서 전두환 대통령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부 보수주의자들과 전사모 등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족 관계
그의 재임시절 형 전기환이 노량진 수산시장을 인수하고, 동생 전경환이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회장을 지내며 이권을 챙기는 등 비리를 일으켜 퇴임 후 물의가 되었다. 부인 이순자의 사이에 재국, 재용, 재만 세 아들과 딸 효선을 두었다. 첫째 재국은 시공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문화에 나타난 전두환문학
전두환을 연기한 배우들같이 읽기바깥 고리
참고자료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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