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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兪吉濬, 1856년 음력 10월 24일~1914년 양력 9월 30일[1][2])은 구한 말 정치가·개화 사상가로 호는 구당(矩堂)이며, 서울에서 태어났다.
생애스물 다섯 살 때인 1881년(고종 18년) 봄 일본에 건너가 일본에 유학, 게이오기주쿠 대학교(慶應義塾)에 입학했다가 1년 만인 1882년에 귀국하였다. 미국과 수교를 체결한 조선은 1882년 미국 공사 후트가 방한하자 조선도 미국에 친선사절단(보빙사)을 파견하였고, 1883년 외무 낭관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한 뒤 유길준도 사절단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사절단은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하고 유길준은 홍영식, 서광범, 고영철, 변수, 현흥택·최경석 등과 함께 사절단에 임명되어 1883년 7월 인천항을 출발하였다. 주미 전권대사 민영익(閔泳翊)을 수행하여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보빙사 일행은 같은해 9월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상륙, 기차편으로 뉴욕에 도착하여 사절단은 40여일 간 미국에 체류하며 미국 대통령을 면담하고 각 기관을 두루 시찰한 후 귀국했다.[3] 유길준은 미국에 계속 남아서 국비로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한국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유길준은 메사추세츠 셀럼시에서 에드워드 모오스 교수의 지도하에 유학준비를 하며 지내다가 1884년 가을학기에 거버너 담마 아카데미(Governer Dummer Academy)에 들어간다. 유길준이 유학 중이던 1884년 12월 4일 조선에서는 갑신정변이 일어난다.[4] 보스턴 대학을 다녔다. 1885년 유럽 여러 나라를 시찰하였고 하버드대학으로 진학할 계획까지 갖고 있었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유학비도 끊어지자 귀국하게 되었다.[5] 귀국후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 구금 기간에 기행문 형식의 국가 개혁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는 《서유견문》을 집필하기 시작해 1895년에 탈고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외무참의 등을 지내고, 1895년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내무협판을 역임하였다. 1896년 내부대신에 올랐으나, 아관파천으로 내각이 해산되자 일본에 망명했다가 1907년 순종 황제의 특사로 귀국했다. 그후 흥사단에 참여하여 활동했고 국민경제회를 설립했으며 계산학교(桂山學校)를 설립했다. 1910년 대한제국의 훈 1등 태극대수장을 받았다. 한일 병합 후 일본 정부에서 남작(男爵)을 주었으나 거절하였다. 노량진에 있는 자택에서 은거하던 중 지병이었던 신장염으로 1914년 9월 30일 아침에 생을 마쳤다. 그의 장례는 10월 7일 한국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치러졌다. 조문객은 대부분 총독부 관리였으며, 일제는 그들의 관점에서 유길준의 지도력을 평가하려 했다.[2] 저서
가족 관계같이 보기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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